아이작 뉴턴 이후 20세기 초는 물리학의 독보적인 발전의 해였다. 당시 물리학의 거장 보어,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하여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과 파동 방정식의 슈뢰딩거 등… 이 시대 물리학계는(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의 관점으로 살펴본) 어떤일이 있었을까?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상대적으로) 너무 유명해져 현재까지 천재라는 단어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에 반해 파동 방정식의 슈뢰딩거는 상대적으로 좀 더 고난을 겪었다. 역사적으로 전쟁이 있었고, 나치시대를 격어 떠돌이 생활. 아일랜드 더블린을 거쳐 결국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최후의 정착으로 생을 마감한다. 아인슈타인 역시 나치시대에 독일에서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옮겨 거기서 여생을 통일장 이론과 함께 마감한다.
두 사람은 편지왕래를 통한 토론과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 여성편력 사생활, 통일이론의 발표를 둘러싼 배신의 시간이 있었지만, 말년엔 학자로서 서로 애정을 담아 인생을 마무리한다.
아인슈타인의 커다란 업적은 광전효과와 상대성이론으로 대표될 수 있으며 그의 천재성이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전성기 이후 통일장 이론 (우주의 두가지 힘, 전자기파와 중력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통합)에 대해 헛발질을 계속하게 된다. 그 이면엔 당대 떠오르는 양자역학 이론에 대해선 고집스러울 정도의 거부감도 존재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끝내 인정하지 않고 이른바 통일장 이론을 만들기 위해 나머지 여생을 바치고 세상을 떠났다.
확률론적 양자역학 이론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비유를 통하여 결정론적 의견을 유지한다. 즉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이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슈뢰딩거는 파동함수를 통하여 양자역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을 우러러보는 위치에서 인과관계, 결정론적 세계를 지지한다. 그의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을 통해 확률론적, 양자역학의 모호함을 비판하였다. (역설적으로 훗날 고양이 사고실험은 슈뢰딩거의 뜻과 다르게 물질이 확률론적 존재한다는 의미의 대표적 모델이 된다. 전자기빔의 이중 슬릿 실험으로 확률론적으로 물체가 두 가지 상태에 동시에 존재함을 증명되었다.)
"만약 내가 아침식사 전에 담배를 피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행동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문제라면 불확정성 원리는 두 사건이 일어나는 빈도를 명확한 통계로 규정할 것이다. 그럼 이 통계가 틀렸다는 것을 내가 행동으로 확실히 입증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만약 내가 통계를 거부할 수 없다면 내가 한 일에 대해 내가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죄를 저리르는 빈도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데 말이다." P.282
통일장 이론과 양자역학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과 맞물린 논쟁을 보면 어느 순간 물리학과 철학적 만남이 교차하는 곳까지 사고가 연장된다. 마치 무지개 빛의 빨주노초파남보라색 연속적 스펙트럼 (색의 경계가 명확치 않다)처럼 어디가 과학이고 언제부터 철학인지 명확한 지점이 분간하기 힘들다.
그중 하나가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세상사 모든 만물이 하나의 이론에 의해 통일되어 궁극적으로 결정론 적이라면 자유의지가 정말 있는 것인가? 우리는 몇 번의 실험으로 조그만 유리구슬이 미끄럼틀에 굴렸을 때 멈추는 지점을 비교적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물리학과 컴퓨터계산의 발전으로 이제 훨씬 복잡한 지구 궤도의 인공위성이 지구로 추락할 경우 낙하지점까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모두 뉴턴의 만유인력 공식에 의해서. 즉 과학적 이론의 발전, 과학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점점 복잡한 현상을 점점 정확하게 예측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이런 공식에 대입하면 궁극적으로 시간의 인과관계, 행동의 인과관계를 통해 때론 사람이 생각하는 최소 뉴런 세포단위, 화학물질의 움직임도 계산이 가능하고 예측이 된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행해 시간이 흐를 뿐이다. 다만 우리 인간은 그 걸 계산하기엔 아직 모르는 부분과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데이터 측정 및 무한대에 가까운 계산으로 알 수 없을 뿐이다 (이 상상이 사실이라면 그나마 다행인 요소라고 할까… ).
이런 차가운 세상에 대해 책에선 아래와 같은 말과 시를 언급하였다.
일반상대성이론을 확장해 다른 힘들까지 그 안에 포함시키면 우리의 운명은 훨씬 더 단단하게 얼어붙을 것이다. 전기와 중력을 함께 설명하는 통일 이론이라면 원칙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혹은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사람의 신경연결을 세밀한 지도로 그려낼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영원히 미리 정해진 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형벌을 선고받게 된다. 영원의 방정식이 일단 한 번 정해지고 나면 우리들의 운명은 그대로 봉인되고 만다. 오마르 하이염은 루바이야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남겼다. "
운명을 적는 신의 손가락,
적고 나면 앞으로 나갈 뿐,
제아무리 기도하고 꾀를 부린들 한 줄이나 되돌릴쏜가.
제아무리 눈물을 쏟은들 한마디나 씻어낼쏜가. p. 155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 명확인 정의는 무엇일까? 정의에 따라 대답은 바뀔 수 있는 성질인가? 내가 이 블로그에 독후감을 작성하는 것도 자유의지의 한 행위일까 아니면 차가운 운명의 흐름일까? 만약 차가운 운명의 흐름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신기루처럼 운명의 종착지를 계산하지 못하며 (마치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을 개발한다 한들 빛은 다시 상대적으로 빛의 속도로 나에게서 멀어질 테니) 운명이란게 있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며 그래서 인생을 내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동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끝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의 당시 언론에는 비친 모습과 다른 면모를 책의 마지막 문단 인용문을 소개한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보면 따뜻함,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응원이 담겨 있다. 어쩌면 돈키호테와 산초처럼 두 사람은 결국 풍차와 싸우려 돌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돈키호테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모한 짓이라 비웃음을 받고, 자신의 삶이 별나게 비쳐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친구는 서로의 곁을 지켰다. 언론에 비친 내용을 보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 폴 핸폴 지음. 2017>
<솔베에 학회 단체사진 인물>
제일 위 왼쪽부터: 피카르, 앙리오트앙리 오트, 에렌페스트, 헤르젠, 드 동데르, 슈뢰딩거, 버샤펠트,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파울러, 브릴루앵
중간줄 왼쪽부터: 디바이, 크누센, 브래그, 크라머르스, 디랙, 콤프턴, 드 브로이, 보른, 보어
제일 아래 왼쪽부터: 랭뮤어, 플랑크, 퀴리, 로런츠, 아인슈타인, 랑주뱅, 게이, 윌슨, 리처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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